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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화를 빛낸 인물] 김노득 선배

관리자 2012-10-12 17:49:55 3840

김노득, 그녀는 진정한 상록수였다.


글 : 교사 장은식
(2012년 개교 114주년 기념 예배 설교문)




* 참고: 이 글은 20129월 성광교회 학술 대회에서 발표된 <김노득의 일생에 관한 논문>의 일부를 발췌한 것임.





김노득은 출생년도 및 가족 구성에 대하여 자료마다 제각각으로 서술되어 있는 바 가장 정확한 자료를 알아보고자 그의 중고등학교 학적부를 추적해 보았다. 그 자료에 의하면 그녀는 일제 메이지 37년 즉 1904216일 서울 중학동 90번지에서 김익제의 11녀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그의 조카 3명과 함께 어린 시절을 주로 경기도 용인에서 지냈다. 이름도 김노득 이외에 오랜 기간 김 복순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서울 종교교회의 유사부장직을 맡고 있었던 김상연으로 그는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고 엄격한 신앙을 가진 바 주일이면 모든 식구들이 쟁기를 잡거나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경기도 용인군으로 이사한 12살 때부터 그녀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지게 되었는데 집밖으로 나가기도 힘들었고 심지어 교회 가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나 김노득은 학업의 길을 계속 이어가고자 생각하고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끓임없이 공부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부모에게 졸랐다. 마침내 부모의 승낙을 얻어 배화여자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소화 2322(1927) 배화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8년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1928년은 그녀에게 인생의 대전환기를 가져오는 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해에 1925년 미국에 건너가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서 1928년부터 협성 여자신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황애덕교수를 만나게 된다. 또한 1928년 훗날 농촌여성운동에 함께 헌신하게 되는 최용신을 만나는 해이기도 하다.


황애덕 교수는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곧바로 학과 과정에 농촌지도학과를 개설하여 농촌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학기 중에는 학생들에게 농촌 실정과 농촌 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들 농민들을 위해 농촌으로 가야한다고 가르치고 여름방학 때는 학생들을 농촌을 파견해 실습하게 하는 등 농촌 사업에 착수 하였다.


김노득은 학교에서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가치관과 사상을 바탕으로 농촌의 현실과 농촌계몽의 필요성을 글을 <우리집>잡지 1932년제 8호에 피력하였다.


이렇듯 귀여운 우리의 농촌형제 유감천만한 것 한가지가 있다. 순진한 형제들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나서서 바른 길로 지도하여 주는 자가 지극히 적어 보인다. .............. 따로 돌아 앉아서는 농촌 농촌하며 농촌을 살려야 된다고 말을 할찌라도 참으로 농촌에 들어가서 저네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저네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평생을 바쳐서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힘쓰는 자 누구 누구 몇몇 사람이나 되는가 저네들은 앎이 없음으로 참담한 생활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그 수효를 다들어 말하기 어렵다.
 



(1) 1930년대의 김노득의 활동


1930년대 김노득이 처음으로 농촌계몽을 위해 간 황해도 수안군은 황해도 북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657미터의 독골산이 솟아 있을 뿐 80%가 펑퍼짐한 평야지대로 분포되어 있다. 하천은 중부로 예성강의 지류인 웃먼개가 관통하고 있으며 산림이 59%이며 농경지는 전체의 41%를 차지하고 논이 65%, 밭이 30% 로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김노득은 수안지역에서 전 주민의 한글 보급, 생활개선과 향상, 주위농민의 자발적 참여와 농촌사업의 확산에 주안점을 두었다.


황해도 수안 지역은 지역적으로 깊은 산골짝으로서 대부분 까막눈 문맹자였고 생활 형편도 극히 원시적이어서 산을 깎아 만든 밭에 보리나 감자를 심어 겨우 연명할 정도였다. 사면 30리에 학교도 없었고 교회도 없었다. 또 우물도 없어서 먼 곳 까지 나가 물을 길어 오는 수고를 해야만 하였다.
게다가 이들의 마음을 몰라주는 현지 농민들의 핍박으로 정신적으로도 무척 힘들었다.
 
우리는 흙을 이겨 떨어진 담벼락, 방바닥을 메우고 가지고 간 도배지를 오려서 집수리를 마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은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 우리는 가지고 간 연필,공책등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현지 사람들이 말하기를 에미나이들 무얼 하나 했더니 연필 장사구먼하고 말했다. ................... 어느날 동네 노인 한명이 와서 이 못된 것들아, 해뜨고 달떠서 또 무슨 문명을 밝히려느냐?“ 소리 소리 지르며 지팡이를 휘두르며 달려들기고 하였다.“

이상의 악조건 속에서도 한 여름 3개월동안 낮에는 어린이, 저녁에는 청장년들을 모아놓고 찬송을 가르치고 글자를 가르쳤다. 그리고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학예회를 여고 그동안 배운 것들을 발표하였다. 마침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이후 서로의 마음이 열리고 이들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이해해 주었다.


마지막 학예 발표회를 마치고 학부형들이 김노득과 최용신을 못가게 하느라고 짐을 뺏어 빈몸으로 상경하였다. 3개월간의 활동을 황애덕에게 보고한 후 김노득은 신학교를 채 졸업도 하지 않고 다시 수안군 용현으로 갔다.

최용신은 힘이 들어 더 못하겠다고 하여 김노득 혼자 간 것이다. 낮에는 어린이, 밤에는 청년들을 모아 가르쳤다. 글만이 아니라 그는 야채 심는 법을 가르치고 서울에서 고구마순을 얻어다가 그 재배법을 가르쳐서 이 마을에 처음으로 고구마를 전해준 최초의 여인이 되었다.


김노득은 일요일이면 부락사람들을 모아 예배를 주재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기도 하였다. 신자의 수가 늘고 포교의 효과도 좋아 황에스더 써클의 지원으로 그곳에 1933년 교회를 세워 성광교회라 이름짓고 학교도 세워 성광 학교라 하였다.

처음에는 동리 어른으로부터 조용한 동네에 예수교를 끌고와서 소란을 피운다고 핍박을 받았으며 마을 청년들은 예배시간에 몽둥이를 들고 찾아오기도 하였다. 여자의 힘으로 시련을 견디기 쉽지 않았지만 김노득은 물러서지 않았다. 박해가 심할수록 더욱 지사적 ,순교자적 헌신봉사에 힘써 실천궁행이 조선을 살린다는 좋은 표본이 되었다. 1934년에는 부근에 용현교회, 이목동 교회를 세우고 여성과 청년들을 계몽하여 나갔다.


경성 기독교 조선 감리회 신학교에 학적을 둔 김노득양은 사리원 지방 수안구역 내 용현교회에서 낮에는 80여명의 무산아동을 모아서 문맹퇴치에 열중하고 밤에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2,30리를 도보로 다니면서 전도하는 .........이 곳에는 주의 복음과 빛과 교육이 날로 보급되어 관민간 찬송하기를 마지 아니하더라
 

이리하여 김노득은 이 마을의 교사요 ,의사요, 목사일 뿐 아니라 나중엔 재판관 대서사의 일까지 하리만큼 지도력을 갖게된다.


김노득은 이처럼 농촌운동에 헌신하였기에 신학공부를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19383월에야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면서 동시에 일본 고베 신학교로 유학하였다. 이 유학은 감리교 신학교 교수와 여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한 홍에스더의 숨은 협조와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3년 후 고베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황해도 수안으로 갔다.


수안에 돌아와 보니 농촌의 생활은 이전 보다 더 비참하였다. 특히 부녀자의 모습이 더 불쌍하였다. 먹고 살기위해 어린아이를 업고 뜨거운 태양을 견디며 밭에서 일하는 모습은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김노득은 곧 밭에서 가까운 곳에 흰광목을 갖고 천막을 만들고 아이들을 데려다가 돌보아 주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돌보아야할 아이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다. 그리하여 아이들을 돌볼 여자들을 고용하고 성광 탁아소란 이름의 건물을 짓고 본격적으로 탁아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사업을 안 황해도청은 현지를 답사한 후 설탕과 밀가루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김노득은 이 마을의 교사요 ,의사요, 목사일 뿐 아니라 나중엔 재판관 대서사의 일까지 하게된다.’ 는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면 일제의 억압과 수탈 속에 고난받고 가난한 황해도 수안 마을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던 성경 속의 갈릴리 마을이었으며 가르치고 전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라명하신 그대로 김노득은 학교를 세워 무지를 깨우쳐 주고 병든자를 고쳐주고 교회를 세워 하나님 말씀을 전하여 주었다.


 
(2) 1950년대의 김노득의 활동

김노득은 황해도 수안군에서 오랫동안 농촌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으면서 서울시 전재 사회국에서 촉탁으로 시무하면서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과 피난민들의 생계를 보살펴 주었다. 그 후 시청 학무국 학무과 장학사로 일하였으며 1947년에는 모교인 배화여중고에서 기숙사 사감과 교사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한편 종교교회 장로로 취임하여 종교교회 교사와 여선교회 회장으로 헌신하였다. 1948년에는 총리원 부녀국 협동총무로 선임되어 해방후 여선교회의 재건과 전도사업을 주관하였다.


1953-1954년에는 농촌부 부장도 역임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성광 모자원에서 샤워 목사가 전쟁 미망인을 돕고 싶어 그 협력자를 구하던 중 김노득을 모자원 원장으로 초빙한 것이었다.

모자원은 1949210일 아펜젤러가 설립한 미실모자원을 시작으로 처음엔 작고한 교역자부인이나 가족들을 수용하다가 일반 교인 유자녀들 까지 수용하였다. 모자원이 보육원이나 고아원과 다른 점은 가장을 잃은 가족 단위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전쟁 미망인들은 당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핵심 고리였던 남편의 부재로 인한 사회적 고통에 직면하고 있었다. 여러 어려운 여건 속에서 무엇보다도 자녀의 진학문제, 결혼문제, 관청 출입문제 등이 큰 문제였다. 80% 가까운 문맹과 무지도 큰 문제였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아가던 전통에서 형성된 모든 친족관계와 교류관계가 단절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마포성광모자원은 앞에서 전술하였듯이 그들에게 가정을 유지할 수 있는 주택을 제공하고 또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일과 터전을 제공했다. 그 중심에 김노득이 있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목자가 되었으며 상담자가 되었으며 자녀 교육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김노득은 또한 황해도 수안에서와 같이 성광 교회를 세워 주일을 지켜 예배하였다. 모자원내의 수산장은 평일에는 삶을 영위하는 생명의 일터이자 가정을 이루는 젖줄이었고 주일에는 영적 생명의 안식처이자 그들의 고통을 부르짖고 토하는 기도처가 되었다. 김노득은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지도자이자 교육 상담자였으며 영적 목자로서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 나누고 울어주었다 .

5척이 채 안되는 작은 체구의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오랜 동안 농촌 봉사와 헌신의 생활이 몸에 밴 작은 거인이었다. 스스로 먼저 근면하고 절약하는 생활의 모범을 보이셨다. 자신을 위해서는 좋은 음식도 먹지 않았고 좋은 옷도 입지 않았다. 무엇 하나 그냥 버리는 경우도 없었다. 헤어진 버선으로는 걸레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그것도 실이 되기 까지 썼다.


당시 모자원에 살았던 최인자 권사의 증언이다.

하루는 아들이 기저귀도 차지 않고 밖에서 놀고 있는데 장로님(김노득)이 부르셔서 말씀하시길 아이를 그렇게 키우면 못쓴다고 하시면서 기저귀를 만들어 쓰라고 구제품을 주시더군요. 장로님은 또 아이들 교육에도 관심이 많으셔서 학비 때문에 쩔쩔 매다가 마지막으로 장로님께 가서 돈을 꾸어달라고 하면 어디가서 꿔다가도 돌려 주시곤 했어요 . 이런 일들이 늘 잊혀지지 않고 아마도 다시는 그런 분을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
 
황해도 수안에서 김노득은 이 마을의 교사요 ,의사요, 목사일 뿐 아니라 나중엔 재판관 대서사의 일까지 하게된다.’ 는 말을 들었던 김노득의 활동은 마포 성광 모자원에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성광교회는 김노득의 사후 그녀의 업적을 기려 교회 입구에 기념비를 세워 그 공적을 기리고 있다.

고 김노득 여사는 1903216일 서울 중학동에서 태어나시고 배화 학당과 감리교 신학교 그리고 고베 신학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하시다. 그는 황해도 용현리에 가시어 용현교회와 성광 학교를 설립하시고 전도사와 교장으로 상록수의 역할을 하시다가 해방 후에는 서울시 학무국 장학사와 배화여자 중학교 교사로 육영사업에 이바지 하였으며 1952년 전쟁 미망인을 위한 성광모자원 원장으로 15년간 긴 세월을 하루같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시는 한편 1957년 그들을 위하여 싸워 목사 내외분과 함께 성광교회를 세우시고 장로로서 최후까지 충성을 다하시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1967812
30일 향년 66세로 별세하시다. 여사의 독실한 믿음과 투철한 개척정신과 나를 버리고 남을 내몸같이 사랑하신 봉사의 생활은 싹이 나고 열매를 맺으며 길이길이 빛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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