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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화를 빛낸 인물] 차미리사 선생

관리자 2012-10-12 17:39:16 3981

차미리사 선생에 대하여
 
 
글 : 배화여고 교사 장은식

(2009년 배화교지 103호 기고)
 

 
차미리사(車美理士) 선생
1879(고종16)~1955
여성운동가, 교육가로 1912-1920 본교 재직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19204월에는 조선 여자 교육회가, 6월에는 조선 교육회가 창립되었다. 조선 여자 교육회는 차미리사가 주도가 되어 조직하였으며 순회강연과 토론회를 개최하고 월간지 <여성시론>을 간행하여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전국 여러 지방에 야학을 개설하여 여성 교육의 대중화를 기하였다.
-출처 :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두산출판사 233

 

 
현재 우리가 배우고 있는 한국근현대사 교재에 언급되어 있듯이 차미리사 여사는 우리나라 여성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분이 한국 최초의 여자교육회를 창설하기 전에는 1912년부터 1920년까지 우리 배화여자고등학교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고 또 기숙사 사감으로 오랜 기간 근무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틈틈이 관심을 갖고 관련 자료와 기사를 봐왔다.
 
차미리사 선생은 1880년 서울 공덕동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섭섭이였다. 아들을 원하였으나 딸로 태어나 섭섭하여 이름을 그리 지은 것이라고 훗날 강연회에서 말하기도 하였다. 17세에 이웃 마을 남자와 중매로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남편이 결혼 3년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차 선생은 절망과 가난 속에 괴로워 하다가 주위의 권유로 남대문 상동교회를 다니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미리사라는 이름은 이 당시에 얻은 세례명이다. 이때 어느 친한 사람의 소개로 헐버트(육영공원을 만들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결사적으로 막고자 노력한 친한파 선교사)를 알게 되었다. 헐버트는 차 선생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생각을 알고 선생을 중국에 있는 미국 버지니아 여학교로 갈 수 있도록 소개해 주었다. 그곳에서 공부하고 다시 미국으로 가서 미국 타스칼 신학과를 졸업한 차 선생은 그곳에서 안창호 선생을 만나 <대동국보회>라는 독립운동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고 또 부인회를 만들어 여성들의 각성과 활동을 위해 앞장섰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자 차미리사 선생은 외국에 있느니 보다는 차라리 고국에 돌아와서 여러 사람들과 손을 잡고 청년 여성을 교육시켜 우리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고는 급히 귀국하였다. 1912년부터 배화학당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근대적 가치관을 심어주는데 앞장서서 활동했다. 당시 같은 시기에 배화 학당에 재직한 남궁억 선생(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협회 등에서 활동)이 남자 교사로서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며 무궁화 심기, 무궁화 자수, 무궁화 찬가 등을 통해 민족 교육의 정초를 놓았고, 차미리사 선생은 여성들의 의식개혁과 실천을 위해 헌신하였다. 차 선생은 남궁억 선생과 함께 무궁화 자수 작업을 통한 나라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함께 일하였는데 후일 차 선생이 여성강습소의 명칭을 근화학원으로 정한 것도 배화학당에서의 무궁화 교육을 통한 민족 교육의 경험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차미리사 선생이 배화 학생들에게 외우게 하다시피 강조하였던 말이며 이후의 야학활동이나 교육활동에서 언제나 주장했던 말인데 이에서 보듯 차 선생의 생각은 민족의 자주와 의식의 각성을 위해 일관된 사상과 가치관을 갖고 노력하신 분이다. 여성들이 외출 시 쓰개치마를 벗어버리도록 하거나 3.1운동이 일어나자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학생들의 만세 시위를 독려하였다. 학교가 파한 뒤 저녁에는 다시 종교교회 야학에서 여성들의 교육과 계몽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였다.
 
19203.1운동 1주년을 맞아 배화 기숙생들이 필운대 산에 올라 만세를 부른 사건이 커지자 당시 에뒤스 교장이 기숙사 사감인 차 선생을 불러 평소 좋지 않게 생각하던 야학 활동을 그만 두거나 아니면 배화학당을 그만 두는 것 중 택일하도록 강요하였고, 차 선생은 정든 배화학당을 그만 두게 된다.
 
차미리사 선생은 이후 조선 여자 교육회를 창립하고 그 산하에 여자 야학회를 설치하여 배움에서 소외된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아 남성들을 위한 조선교육회가 두달 뒤에 생긴다. 차 선생은 여성들로만 구성된 전국 순회강연단을 만들어 구관습 및 구사상의 타파, 생활 개조, 여성 해방, 남녀평등사상을 고취하며 신문화, 신사상을 보급하였고 모금활동을 하여 모은 성금으로 서울 안국동에 집을 마련하여 무궁화를 의미하는 근화학원이라 명명한 여자 야학교를 만들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 전국 순회강연단은 84일동안 67고을 1만여 리를 순회하면서 조선 여성들을 잠에서 깨우고 계몽하였으니 ...... 중략 ...... 순회강연은 조선 여성들에게 일대 광명이며 생명 있는 신운동이다.’
 
이 근화학원이 날로 발전하여 근화여학교로 승격되고 다시 재단법인 근화여자실업학교로 확대, 발전하였다. 차 선생은 배화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일본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전국의 대다수 학교에서 동맹휴학을 하고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나와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는데 근화여학교 학생 수백명도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로 나왔다. 이 사건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이들 학생 모두를 퇴학이나 무기정학 시키라고 강요받았으나 차미리사 선생은한 명의 학생도 끝까지 처벌하지 않았다. 1930년대 말 일제의 민족말살통치와 가혹한 탄압으로 차미리사 선생은 결국 교장직에서 물러났고 학교도 더 이상 근화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학교 이름이 지금의 덕성여자고등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지금의 덕성여자고등학교 및 대학교의 교표는 무궁화 잎 모양이고, 교화도 무궁화이다. 그런데 차 선생의 이러한 무궁화 사랑이 바로 우리 배화에 근무하면서 싹튼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참으로 뿌듯한 마음이 든다.
 
해방 이후에도 차 선생은 열심히 교육사업과 여성운동을 위하여 헌신하며 살다 1955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2002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최근 덕성여대의 학내 분쟁이 타결되고, 여성운동가로 여성부 장관을 지낸 지은희 총장이 새로 취임하면서, 차미리사 기념건물 및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학교 홈페이지에도 선생에 대해 많은 홍보를 하고 있음을 볼 때 차 선생에 대한 평가가 이제야 바로 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1910년대 이후의 그 암울한 시기에 차미리사 선생이 바로 우리 배화학생들에게, 더 나아가 봉건적 구습과 또 일제의 압박에 눌려 살던 조선의 모든 여성들에게 외치고 호소했던 그 말이 지금도 그 분의 뜨거운 열정과 기도와 헌신의 모습과 함께 우리 배화 교정에 쟁쟁하게 울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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